등대
 글쓴이 : 노닐다부족장
작성일 : 2012-11-14 15:22   조회 : 3,024  

 
등대...
배들이 항로를 잃거나 암초에 좌초하지 않도록 불을 밝혀 비춰 주는 기능을 하는 기구 혹은 설치물.
 
숱한 시인과 예술가들이 등대의 상징과 메타포로 삶의 진실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지혜, 선구적 지성, 희생, 헌신, 먼저 깨달은 자의 고독과 의무...
버지니아 울프는 '등대로'라는 소설을 통해 삶의 의미를 탐구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파헤쳐 보여 주었다.
영국민요에 가사를 붙인 '등대지기'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해변에만 가면 부르는 애창곡이다.
-얼어붙은 달 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한겨울의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등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자세와 떠올리는 생각들은 제각각 다르지만, 등대의 고유 기능이 여러 백 년의 세월 동안 점점 쇠퇴해 온 것만은 분명하다.
소형 어선들조차 위성항법장치를 장착하고 항해하는 요즈음, 등대는 아스라한 향수를 자극하거나, 낭만적인 사연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사진 배경으로 쓰이는 때가 더 많다.
 
쇠머리오름(우도봉) 정상에는 1906년에 일을 시작해 97년 동안 쉼 없이 불을 밝혀 온 등대가 있다. 제 소임을 다하고 뒤로 물러앉아 있는 이 '구등탑'은 이를테면 정년퇴직한 노인네다.
22년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고 나오면서, 나는 할 만큼 했으니까 이제 젊은이들이 하셔...했던 나의 행태가 낯뜨거운 '97년' 세월이다.
 
새로 세워진 신등탑은 16미터 높이의 원형 대리석 기둥으로 만들어져 위용이 남다르다.
어둑어둑해질 무렵부터 우도 주변 해상을 향해 둥그런 흰 빛줄기를 비추며 도는 우도봉 등대는, 가부장적 가정의 위엄 있는 아버지처럼 당당하면서 동시에 시대착오적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권위는, 그것이 따스함과 공감과 이해로 손 맞잡은 가족 구성원의 합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데서 근본적인 균열이 시작된다. 전통과 관습에 기댄 경직의 완고함. 저 '아버지의 권위'라는 것이 무너지면 '아버지'라는 인격 자체가 망가져 버리고 말 것임을 가족이 다들 알고 있어서 유지되는, 그 조심스럽고 작위적인 허세...
낡은 권위와 적어진 쓸모를 안고 서 있는 등대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처럼 외롭고 안쓰럽고 그 처연함의 강도만큼 아름답다. 자기 역할을 감당하느라 애쓰며 오랜 세월을 견디는 모든 물건과 사람들처럼...
(사진의 등대는 나이가 백 살도 넘은 우도봉의 옛날 등대, '구등탑'입니다.)